“글씨도 키우고, 눈에 잘 띄는 색을 써서 집 찾기가 쉬워졌어요.” 문경남(84) 어르신은 몇 해 전부터 글씨가 잘 안보여 매일 오가는 집을 찾는데도 간혹 애를 먹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달라졌다. 서울시에서 문 어르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인지건강 디자인을 적용하면서 집을 찾는 것이 수월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 주변 곳곳에 인지력을 높일 수 있는 디자인을 적용해 이전보다 기억력도 나아졌다. 문 어르신은 “집 주변 위주로 산책하는 노인들을 배려한 디자인 덕분에 외출이 쉬워졌다”고 말했다. |  | | ▲ 서울시가 영등포구 한 아파트에 ‘인지건강 디자인’을 적용한 모습. 중앙에 1이라는 숫자는 층수를 나타내고 우측에는 홀·짝수 층별로 색깔을 달리한 우편함을 설치했다. 건물 내부 경로당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큰 글씨로 방향도 표시했다.사진=조준우 기자 |
서울시, 영등포‧양천구 등에 인식 능력 높이는 ‘인지건강 디자인’ 도입 노원구 아파트 단지는 집 내부에도 적용… 시, 가이드북 만들어 배포 최근 서울시가 노인 등 인지능력이 약해진 사람들을 위해 인지건강 디자인을 보급하고 나서면서 그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인지건강 디자인이란 자신이 사는 동·층을 찾기 어려워하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겪는 경도 인지 장애(치매 전 단계)나 초기 치매 환자를 포함한 65세 이상 노인들을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 환경을 바꾸고 인지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고안된 디자인을 말한다. 서울시는 지난해 처음 영등포구, 노원구, 양천구 등 3곳에 2억~4억원의 예산을 들여 인지건강 디자인을 도입했다. 올해에도 서울 송파구를 비롯한 일부 지역서 시범사업을 진행하는 등 점차적으로 서울 전 지역으로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인지건강 디자인은 국내에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외국에서는 활발히 연구·적용되고 있는 분야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을 꼽을 수 있다. 이 마을은 치매 노인들이 생활하기 편하도록 동네 전체에 다양한 디자인을 입혔다. 여기선 마트 직원, 경비원 등으로 변장한 의료진 400여 명이 환자 상태를 수시로 확인한다. 영국과 호주도 각각 치매서비스개발센터(DSDC)와 치매자립환경프로젝트(DEEP) 통해 인지건강 디자인을 연구‧보급하고 있다. 서울시는 천편일률적으로 도입하지 않고 해당지역을 사전답사 해 대상 노인들의 환경과 눈높이에 맞춘 디자인을 적용했다. 먼저 영등포구 신길4동 삼성 래미안 2단지 아파트 1개동에는 고령자가 많이 사는 것을 감안해 바닥이나 벽면에 화사한 색깔을 많이 쓰고 미로 같은 아파트 내부에 숫자를 크게 적어 인지능력이 약해진 이들이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또 바닥에 초록색을 칠해 단지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을 만들고 턱이 있는 부분은 노란색으로 표시해 노인들의 낙상사고도 방지했다. 걷다가 힘들면 쉴 수 있도록 100m 간격마다 1인용 벤치를 뒀다. 특히 아파트 뒤편 배드민턴장을 전면 개편해 ‘보행연습’, ‘선을 따라 균형 잡기’ 등 인지력을 높일 수 있는 각종 체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지압 효과를 느끼며 걸을 수 있는 지압길도 조성했다. 아울러 출입구와 주차장도 구역을 나눠 ‘해·달·별’과 같은 이름을 붙여 그림만 보고도 주로 이용하는 출입구를 단번에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안전난간과 미끄럼방지 바닥, 조명도 설치했고 모든 층 벽면에 눈에 잘 띄는 색깔로 크게 층수 등 숫자를 적고, 각 호수의 방향을 안내해 쉽게 집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똑같은 우편함을 홀짝층으로 나눠 다른 색깔을 칠하고 호수를 더 크게 적어 알아보기 쉽게 했다. 반면 차도와 인도 구분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양천구 신월1동의 주택가는 이면보도 바닥에 선을 그려 동네를 돌 수 있는 순환형태의 길을 만드는데 중점을 두고 디자인을 적용했다. 걷다가 쉴 수 있게 길 중간에 쉼터를 조성했고 동네의 터줏대감인 슈퍼마켓과 부동산 운영자를 ‘반장’으로 지정해 길 잃을 가능성 있는 어르신이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을 주도록 했다. 반장인 점포 앞에는 색깔 있는 표지판을 설치했다. 가장 최근 완료한 서울 노원구의 SH공릉 1단지 아파트는 집 내부에도 인지건강 디자인을 도입했다. 출입문과 화장실 주변 벽에는 허리 높이의 노란색 안전 손잡이를 달았고 조명 스위치에는 ‘주방’, ‘화장실’ 등 구분이 쉽도록 큰 글씨를 붙였다. 주방 싱크대에도 유리문이 있어 안에 든 식기가 무엇인지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주민들의 반응도 좋다. 시범사업을 시작한 3곳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5.9%가 “길을 잘 찾게 됐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서울시는 이런 사례를 바탕으로 가이드북을 배급하는 등 전국화에도 나설 예정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실내 디자인에 적용할 정보를 담은 ‘인지건강 주거환경 가이드북’을 만들어 서울과 대전·창원시 등에 5000여 권을 전달했다”며 “이달부터 공사를 시작한 송파구 마천동 저층 주거지를 비롯해 인지건강 디자인 적용 지역을 점차 늘리겠다”고 말했다. 배성호 기자 |